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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5.08.15 Santa Messa nella Parrocchia Pontificia di San Tommaso da Villanova a Castel Gandolfo 22025.08.15 Santa Messa nella Parrocchia Pontificia di San Tommaso da Villanova a Castel Gandolfo  (@Vatican Media)

[미사강론] 교황, 성모님의 '네'라는 응답은 ''순교자들 안에서, 신앙과 정의, 온유와 평화의 증인들 안에서 살아 있다."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교황 성하께서 카스텔 간돌포의 본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셨다.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 강론
산 토마소 다 빌라노바 교황청 본당
카스텔 간돌포
2025년 8월 15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이 주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역사를 바꾸신 예수님의 파스카를 다른 방식으로 기념합니다. 나자렛의 마리아 안에는 우리의 역사, 곧 전체 인류 안에 잠긴 교회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생명과 자유의 하느님께서는 이 역사 안에 육화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 죽음을 이기시는지를 묵상합니다. 왕국은 그분의 것이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분 사랑에 대한 “네”라는 응답은 우리의 몫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유로운 선택으로 “네”라고 말씀하셨고, 그 “네”는 죽음의 권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 우리의 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을 박고, 우리 마음이 두려움과 불신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죽음은 여전히 세상에 퍼져 나갑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는 믿음이 승리했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사랑이 승리했으며, 용서가 승리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곳에 아드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두려움과 불신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분의 “네”에 우리 자신의 “네”로 응답할 때, 우리 자신들이 곧 성모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순교자들 안에서, 그리고 신앙과 정의, 온유와 평화의 증인들 안에서 그 “네”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죽음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의 날은, 우리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선택하도록 책임을 부여하는 날입니다.

이 성모 승천 대축일 전례는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복음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구절을 통해, 성모님의 소명 안에서 결정적인 순간의 기억을 전합니다. 성모님의 존재의 목표를 기념하는 날인 바로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천주의 모친의 역사를 포함하여 지상의 모든 역사는 짧고 결국 끝이 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삶이 끝날 때, 그 고유한 존재감은 오히려 더 분명하게 빛납니다. 복음이 젊은 성모님의 입술에 담아 전한 ‘마니피캇(Magnificat)’은 이제 그녀의 모든 날들을 밝혀줍니다. 사촌 엘리사벳을 만난 그날 하루는 다른 모든 날, 모든 계절의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말로만 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노래를 이른 아침부터 해 질 무렵까지, 그리고 “대대로”(루카 1,50) 계속해서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엘리사벳의 놀라운 결실(임신)은 성모님의 믿음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이는 곧 성모님의 “네”라는 응답의 풍성한 결실을 앞당겨 보여준 것이고 하느님의 새롭게 하는 말씀을 받아들일 때 성모님 응답의 결실이 교회와 인류 전체의 풍요한 결실로 이어진다는 점을 앞당겨 보여준 것입니다. 그날, 두 여인은 믿음 안에서 만났고, 이후 석 달 동안 실질적인 문제뿐 아니라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식에 있어서도 함께 서로 의지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은 오늘날에도 우리 세상에 이렇게 들어옵니다. 죽음의 말과 선택이 우세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생명은 구체적인 형제애의 경험과 새로운 연대의 몸짓을 통해 절망을 단절시킵니다. 사실, 부활은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맞기 전에,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 영혼과 육신 모두를 – 변화시킵니다.

성모님의 노래, 즉 성모님의 마니피캇은 겸손한 이들, 굶주린 이들, 하느님의 충실한 종들을 희망으로 굳건하게 합니다. 그들은 곧 환난 중에도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참행복을 지닌 남녀들입니다. 즉 권좌에서 쫓겨난 권력자들, 빈손이 된 부자들, 실현된 하느님의 약속들을 보는 이들입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모두가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경험들입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다시 빛을 발합니다. 우리가 악에 대하여 선으로, 죽음에 대하여 생명으로 맞서는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참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때로는 인간적인 확신, 일정한 물질적인 풍요, 그리고 양심을 무디게 하는 느슨함이 지배하는 곳에서 이러한 믿음은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체념과 한탄, 향수와 불안의 형태로 죽음이 스며듭니다. 낡은 세상이 끝나가는 것을 보기보다는, 오히려 부유한 자들, 권력 있는 자들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이는 대개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에 대한 경멸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연약한 지체들 안에서 살아가며, 그들의 찬미가(마니피캇)을 통해 다시 활력을 얻습니다.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박해받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분쟁 지역에서 온유함과 용서를 증거하는 사람들, 산산조각 난 세상에서 평화를 일구고 다리를 놓는 이들은 교회의 기쁨이며, 다가오는 하늘 나라의 첫 열매이자 교회의 영원한 열매입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나이 든 엘리사벳과 젊은 성모님처럼 여성입니다. 그들은 곧 파스카의 여인들이자 부활의 사도들입니다. 그들의 증거를 통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생명을 선택할 때”(신명 30,19 참조), 우리는 하늘에 들어올려 지신 성모님 안에서 우리의 종착점을 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합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부활이 고립된 사건이나 예외적인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표징으로 우리에게 선사되신 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삼킬 수 있습니다(1코린 15,54 참조). 물론, 이는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자유가 맞닿아 있는 존재이며, 우리 각자가 신뢰와 용기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의 삶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촉구하시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저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루카 1,49).

우리 각자가 이 기쁨을 체험하고, 새로운 노래로 이를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것은 때때로 위험하거나 신중하지 않게 보일 수 있습니다. “왜 그걸 하려고 해? 그냥 포기해! 네 이익이나 생각해.” 얼마나 많은 목소리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이는지요? 이것들은 죽음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시대에 그분의 사랑은 영혼과 육신을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개인으로서 그리고 교회로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맙시다. 바로 이것, 오직 이것만이 생명을 퍼뜨리고 생명이 승리하게 합니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승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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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8월 2025, 1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