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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Papa in Laterano per messa e processione Corpus Domini Il Papa in Laterano per messa e processione Corpus Domini  (ANSA)

[미사강론]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배고픔’에 응답하십니다”

레오 14세 교황은 6월 22일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강론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면 우리 삶에 힘과 의미를 주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많은 이들이 비참하게 사는” 현실 앞에서 “소수가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무관심한 교만의 표징이며 불의를 낳는다”고 질타했다. 미사 후 성체 행렬이 성모 대성전까지 이어졌다. 교황은 성체 행렬의 의미를 설명하며, 성체성사를 “더욱 굳건히 믿도록” 믿는 이들의 마음에 내보이고 “우리 영혼이 품은 굶주림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도록”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에 내보이자고 초대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와 성체 행렬, 성체강복
레오 14세 교황의 강론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광장
2025년 6월 22일, 주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만큼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을까요. 방금 선포된 복음 말씀이 이를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은 수많은 군중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 곁에서 몇 시간이고 머물렀다고 전합니다(루카 9,11 참조). 고통받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의 연민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친밀함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 인간은 모든 악에서 해방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기쁜 소식을 받는 이들에게도 시련의 때는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 메마른 벌판에서 스승의 말씀에 귀 기울이던 군중 앞에 어스름이 내리자 주변에는 먹을거리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12절 참조). 군중의 허기와 일몰은 이 세상과 모든 피조물 위에 드리워진 한계의 표징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하루와 같아서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바로 그 시간, 궁핍과 어둠이 엄습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해가 지고 굶주림은 더해가는데 제자들까지 나서서 사람들을 돌려보내자고 청합니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그들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배고픔은 하느님 나라 선포와 구원의 증거와는 동떨어진 욕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굶주림이야말로 하느님과 우리가 맺는 관계의 핵심을 건드립니다. 그런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을 다 먹이겠습니까? 제자들의 계산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의 얕은 믿음만 드러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하면 우리 삶에 힘과 의미를 주는 모든 것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굶주림의 간절한 호소에 예수님께서는 나눔의 표징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축복하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모든 군중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16절 참조). 주님의 이 몸짓은 복잡한 마법 의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께 드리는 순박한 감사와 그리스도의 자녀다운 기도, 성령께서 북돋우시는 형제적 친교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려고 군중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니 모든 사람이 먹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남은 것도 많았습니다. 모두 배불리 먹은 후에도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17절 참조).

이것이 바로 굶주린 백성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일하시며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군중과는 다르게 자신의 배고픔보다 오히려 다른 이들의 탐욕 때문에 짓밟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비참하게 사는데 소수가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무관심한 교만의 표징입니다. 이것이 고통과 불의를 낳습니다. 나누기는커녕 풍요로움이 땅의 열매와 인간이 흘린 땀의 결실을 헛되이 낭비합니다. 특히 이 희년에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은 우리가 행동하고 봉사할 때 따라야 할 긴급한 기준이 됩니다. 곧, 빵을 나누고 희망을 키우며 하느님 나라가 다가옴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굶주림에서 구하심으로써 모든 이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것이라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찬례에서 거행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굶주림이 우리 삶의 근본적 궁핍을 드러내는 표징인 것처럼, 빵을 떼어 나누는 것은 구원이라는 하느님 선물의 표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야말로 인간의 굶주림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십니다. 그분의 몸이 영원한 생명의 빵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예수님의 초대는 우리의 일상 체험을 모두 아우릅니다. 살려면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생명을 취하여 그것으로 몸을 길러나갑니다. 그런데 죽은 것을 먹는다는 사실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우리 역시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살아 있고 참된 빵이신 예수님으로 우리 자신을 길러나갈 때,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심으로써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으로 자기 자신을 길러나가도록 창조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배고파하는 우리의 본성은 성찬례의 은총으로 채워지는 궁핍의 표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전혀 모자람 없이 우리를 기르시는 빵이시고 결코 고갈되지 않게 먹을 수 있는 빵”(panis qui recifit, et non deficit; panis qui sumi potest, consume non potest”, 「설교」130,2)이십니다. 사실 성찬례는 구세주의 참되고 실재적이고 실체적인 현존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413 참조). 빵을 당신 자신으로 변화시켜 우리를 그분 안에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살아 있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몸이 우리를, 곧 교회 자체를 주님의 몸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따라(1코린 10,17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찬의 빵을 나누는 성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자들의 일치가 표현되고 실현된다. 모든 사람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이렇게 일치되도록 불리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며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3항). 잠시 후 우리가 시작할 성체 행렬이 바로 이러한 여정의 표징입니다. 목자들과 양 떼가 함께 어우러지고,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성체로 양분을 받고, 성체를 경배하며 성체를 모시고 거리로 나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체를 사람들의 눈과 양심과 마음에 내보입니다. 더욱 굳건히 믿도록 믿는 이들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 영혼이 품고 있는 굶주림과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빵에 대해 물어보도록 믿지 않는 이의 마음에 성체를 내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기운을 차린 우리는 모든 이의 마음에 에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를 구원 사업에 참여시키시고, 각자를 당신의 식탁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초대받은 이들은 복됩니다!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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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6월 2025, 1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