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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dinal Domenico Calcagno holds Chrism Mass at the Vatican Cardinal Domenico Calcagno holds Chrism Mass at the Vatican  (ANSA)

성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강론 “성직주의에서 벗어나 희망을 선포하는 이가 되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신해 도메니코 칼카뇨 추기경의 주례로 4월 17일 성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가 거행됐다. 칼카뇨 추기경이 대독한 강론에서 교황은 사제들에게 희년을 맞아 “회심을 통해 새롭게 출발하라”고 당부하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말씀을 살아내라고 초대했다.

성유 축성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도메니코 칼카뇨 추기경의 대독
성 베드로 대성전
2025년 4월 17일 성목요일

 

존경하는 주교와 사제 여러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묵시 1,8 참조).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나자렛 회당의 예수님, 어린 시절부터 그분을 알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이 계시, 곧 “묵시”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펼쳐집니다. 이 계시의 중심축에는 희망의 토대가 되는 육신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과 우리의 육신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은 이 희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랑의 빛 아래 모든 종말론적 두려움을 녹여내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를 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역사의 책이 열리고, 우리는 그 의미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사제들도 저마다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목요일에 우리는 사제 수품 때에 한 서약을 갱신하면서, 나자렛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 역사를 올바로 읽을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신”(묵시 1,5 참조) 분께서 우리 삶의 두루마리도 펼치시어, 그 의미와 사명을 드러내는 길을 발견하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우리의 직무는 참된 희망의 직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역사 안에서 희년, 곧 은총의 시간과 영적 쉼터를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내 삶을 하느님 안에서 읽는 법을 배우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하는가?’

희년이 우리 삶 안에서 시작될 때, 온 백성이 참된 쉼을 얻습니다. 이는 25년마다 한 번씩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 곧 사제가 자기 백성 가까이에 있는 그 순간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습니다”(묵시 1,6). 여기에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이 사제들의 나라는 성직자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빚어내시는 “우리”는 경계를 나눌 수 없고, 장벽과 국경이 허물어진 백성입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께서 성전의 휘장을 찢으시고, 인류를 위해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도성인 새 예루살렘을 준비해 두셨습니다(묵시 21,25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제직을 이해하고 우리도 그렇게 이해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우리 사제들의 직무는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 데 있다는 것, 그 백성은 장차 성전조차 필요 없는 새 예루살렘에서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희년은 우리 사제들에게 회심을 통해 새롭게 출발하라는 특별한 초대입니다. 우리가 희망의 순례자로서, 권위를 추구하는 성직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참된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물론,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이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도 그분께서 나자렛에서 겪으신 것과 같은 반대와 배척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 양떼를 사랑하는 목자는 인기나 칭찬만을 좇아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충실히 살아갈 때, 마침내 변화의 씨앗이 심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를 가장 먼저 알아보지만, 서서히 다른 이들의 마음도 움직이며 진리의 빛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보십시오, (…)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묵시 1,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을 함께 고백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위처럼 굳건합니다!” 우리가 함께 체험하게 될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교회와 우리 사제직의 단단한 토양입니다. 어떤 토양일까요? 그저 버티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이 기름진 땅은 무엇일까요?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 샤를 드 푸코가 예리하게 간파했듯이 나자렛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셨다”(루카 4,16 참조). 여기서 예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최소 두 가지 신앙생활 모습이 드러납니다. 회당에 꾸준히 참석하는 모습과 성경 말씀을 읽는 모습입니다. 우리 삶도 이러한 좋은 신앙생활들로 굳건히 세워집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때때로 형식에 그칠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 말씀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열두 살 때 성전에서 이미 그 모습을 보이셨고, 이제 성인이 되자 성경 말씀은 당신이 편안히 머무르는 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로서 발견하는 굳건한 토대, 살아 있는 토양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루카 4,17).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 회당에서는 토라(Torah, 율법서)를 읽은 후에 랍비가 예언서에서 말씀을 찾아 그날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예언 가운데 특별히 당신 생애의 사명을 담은 구절을 찾아 읽으신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의미심장한 순간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예언 중에서 바로 당신이 이루실 말씀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는 이루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하느님 말씀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 말씀으로 다른 이들을 참되게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특별히 마음을 울리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이 자기 삶에 깊은 울림을 주는 성경 말씀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혼인 예식의 독서를 선택하는 예비부부들이나, 사랑하는 이를 하느님께 돌려보내며 위로의 말씀을 찾는 유가족들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바로 이런 도움입니다. 대개 우리 각자의 사제 소명 여정의 시작에도 우리를 부르신 특별한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소중히 간직할 때, 우리의 첫 사랑이 식지 않도록 하느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부르십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택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한, 그분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이 되고 우리는 그 사명에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셨다”(루카 4,17-20 참조).

이제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께 쏠립니다. 그분께서는 방금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도 다른 누군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성령의 권능 안에 있는지 온전히 아시는 분으로서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신비가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글자로만 남아있지 않고, 말씀이 생명을 얻어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새롭고 놀라운 일입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만일 하느님의 약속이 그저 약속으로만 남고 이 땅에서 구체적 현실이 되지 않는다면, 은총도, 메시아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참으로 새롭게 변화됩니다.

이것이 우리 사제직에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성령입니다. 우리는 서품 때 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영은 우리의 모든 봉사 안에서 보이지 않게 이끄시는 주인공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말씀이 삶이 되어 실천될 때, 신자들은 그 생명의 숨결을 느낍니다. 가난한 이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어린이들, 청소년들, 여성들, 교회와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이들까지도 성령을 알아보는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영과 하느님의 영을 정확히 구별하며,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그 안에서 성령의 현존을 알아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취된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소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성하는 성유는 그리스도인 삶의 다양한 순간마다 이 거룩한 변화의 신비를 새기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명심하십시오. 결코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굳게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여정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고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에 언제나 충실하십니다. 서품식에서 들었던 말씀을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셨으니, 친히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을 해방시켜 주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서의 두루마리에서 이 구절을 찾으셨다면, 오늘도 그분은 우리 각자의 일대기에서 그 말씀을 계속해서 읽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지막 날까지 항상 그분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우리를 속박에서 풀어주시며,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우리 삶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 사명에 초대하시고 성사적으로 당신 생명에 동참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도 해방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의 사제직은 그렇게 예수님처럼 희년을 선포하는 직무가 됩니다. 뿔나팔을 요란하게 불지 않고도, 조용하지만 철저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헌신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비유가 들려주는 그 나라입니다. 반죽에 넣은 누룩처럼 조용히 효과적으로,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보이지 않게 일하는 나라입니다. 작은 이들이 얼마나 자주 우리 안에서 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알아보았는지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이러한 하느님의 놀라운 일에 감사드렸는지요?

하느님만이 수확이 얼마나 풍성할지 아십니다. 우리 일꾼들은 그저 수확의 수고와 기쁨을 함께 체험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래로 이미 시작된 메시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망의 유혹을 떨쳐버리십시오! 오히려 되돌려주고 빚을 탕감하며, 책임과 자원을 다시 나누는 일에 힘쓰십시오. 하느님의 백성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갈망합니다. 그들은 함께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들도 세례의 은총으로 사제 직분에 참여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장엄한 미사에서 우리가 축성하는 성유는 하느님 백성의 위로와 메시아께서 선사하신 참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확할 밭은 바로 이 세상입니다. 깊은 상처로 신음하는 우리 공동의 집(지구), 끊임없이 부정당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인류 가족의 형제애가 우리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수확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이 밭은 우리가 뿌린 씨앗보다 백 배나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생명의 땅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수행해 나갈 때, 모든 수고를 넘어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우리에게 새 힘을 불어넣기를 바랍니다. 모든 농부가 잘 알고 있듯이, 때로는 씨앗이 자라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계절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메마른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에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당신 일꾼들의 머리에 기쁨의 향유를 부어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희망의 백성인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오늘 사제들의 기쁨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성경이 약속하고 성사들이 우리 영혼에 심어주는 참된 해방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비록 수많은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깊은 불의가 우리 세상을 어둡게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한없이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픈 상처마다 치유의 향유를 부어주시고, 우리의 모든 눈물을 손수 닦아주십니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묵시 1,7). 그분의 나라는 세세 대대에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번역 김호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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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4월 2025, 20:14